HDMI 케이블, 비싼 게 정말 좋을까요? (사기당할 뻔한 썰)

몇 년 전, 제가 4K TV와 플레이스테이션을 새로 샀을 때의 일입니다. 모든 걸 완벽하게 설치하고 마지막으로 HDMI 케이블을 사러 대형 마트에 갔죠. 케이블 코너에 갔더니 가격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. 5천 원짜리 비닐에 든 케이블부터, 번쩍이는 금도금 단자에 두꺼운 선, 화려한 포장까지 갖춘 5만 원짜리 ‘프리미엄’ 케이블까지.

점원은 제게 “고객님, 4K 화질을 제대로 즐기시려면 이 정도 프리미엄 케이블은 쓰셔야죠. 화질이랑 음질이 다릅니다.” 라며 비싼 케이블을 추천했습니다. 솔직히 혹했습니다. ‘그래, 기왕 큰돈 썼는데 케이블 하나 때문에 화면 구리면 안 되지’ 하는 마음에 거의 결제할 뻔했죠.

그때 마침 IT 기기를 잘 아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고,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더군요. “야, 그거 다 상술이야. 그냥 제일 싼 거 사.”

가성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본 입장에서, 그날 친구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저는 5천 원짜리와 아무 차이도 없는 케이블에 10배의 돈을 쓸 뻔했습니다. HDMI의 세계, 생각보다 단순하고, 또 생각보다 중요한 포인트가 숨어있습니다.

그래서 HDMI, 대체 정체가 뭔데요?

영상과 소리를 한 줄에! ‘만능 국밥’ 케이블

HDMI(High-Definition Multimedia Interface)는 말이 좀 어려운데, 그냥 ‘영상 신호’와 ‘음성 신호’를 케이블 하나로 모두 전송하는 만능 규격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.

예전에는 컴퓨터와 모니터를 연결하려면, 영상은 파란색 D-Sub 케이블, 소리는 동그란 초록색 스피커 케이블, 이렇게 주렁주렁 여러 개를 꽂아야 했죠. HDMI는 이 모든 걸 케이블 딱 한 줄로 깔끔하게 해결해버린 ‘혁명’ 같은 존재입니다. TV, 모니터, 컴퓨터, 게임기, 셋톱박스 등 요즘 나오는 거의 모든 영상 기기에는 HDMI 단자가 달려있죠.

HDMI 케이블, 비싼 건 다 상술입니다 (단, 예외 있음)

디지털 신호의 세계: 0과 1만 있을 뿐

친구가 왜 제일 싼 걸 사라고 했을까요? 그 이유는 HDMI가 ‘디지털(Digital)’ 신호를 전송하기 때문입니다.

디지털 신호는 그냥 ‘켜짐(1)’과 ‘꺼짐(0)’이라는 두 가지 신호만으로 이루어져 있어요. 케이블의 역할은 이 0과 1 신호를 손실 없이 그대로 전달하기만 하면 끝입니다. 5천 원짜리 케이블이 0과 1을 잘 전달한다면, 5만 원짜리 금도금 케이블이라고 해서 0과 1을 ‘더 선명하게’ 전달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. 화면이 나오면 똑같은 화질로 나오는 거고, 안 나오면 그냥 안 나오는 겁니다. 중간은 없어요.

번쩍이는 금도금 단자? 그냥 보기 좋으라고, 혹은 아주 미세한 부식 방지 효과 정도입니다. 화질과는 1도 관련이 없어요.

딱 하나, ‘이것’만 보고 사시면 됩니다: 버전

HDMI 케이블에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가격이나 모양이 아니라, 오직 ‘버전’ 입니다. 버전은 데이터가 지나다니는 ‘고속도로의 차선 수(대역폭)’를 의미해요. 버전이 높을수록 더 넓은 도로를 제공해서, 더 높은 화질과 주사율의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습니다.

  • HDMI 1.4: 구형 FHD(1080p) TV나 모니터에 주로 쓰이던 옛날 2차선 국도.
  • HDMI 2.0: 4K 60Hz를 지원하는, 지금도 가장 널리 쓰이는 왕복 4차선 도로.
  • HDMI 2.1: 4K 120Hz, 8K 60Hz까지 지원하는, 미래를 위한 왕복 8차선 초고속도로.

그래서 나한테 맞는 버전은 뭘까요?

케이블 버전은 내가 가진 ‘기기’와 ‘모니터(TV)’가 지원하는 가장 높은 버전에 맞춰주면 됩니다.

이런 분들은 HDMI 2.0이면 충분합니다

  • 일반적인 4K 60Hz TV나 모니터를 사용하시는 분. (넷플릭스, 유튜브 감상 등)
  • 닌텐도 스위치, 플레이스테이션 4 같은 구형 콘솔 게임기를 연결할 때.
  • 일반적인 사무용, 웹서핑용 컴퓨터에 연결할 때.

시중에 파는 대부분의 ‘고속(High Speed)’ HDMI 케이블이 바로 이 2.0 규격을 지원합니다. 그냥 제일 저렴한 걸로 사시면 돼요.

이런 분들은 반드시 HDMI 2.1을 사야 합니다

  • 플레이스테이션 5, Xbox Series X 같은 최신 콘솔 게임기를 120Hz 지원 TV/모니터에 연결하시는 분.
  • 지포스 RTX 3000/4000 시리즈, 라데온 RX 6000/7000 시리즈 같은 최신 그래픽카드를 4K 120Hz 이상 고주사율 모니터에 연결하시는 분.

HDMI 2.1이 제공하는 넓은 도로가 없으면, 4K 120Hz라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지나갈 수 없습니다. 기계는 지원하는데 케이블 때문에 제 성능을 못 쓰는 거죠. HDMI 2.1 케이블은 포장에 ‘초고속(Ultra High Speed)’ 이라고 쓰여 있는지 꼭 확인하고 구매해야 합니다. 특히 구매시 4K 120Hz를 원한다면 HDMI 2.1 버전은 꼭 확인하고 구매하셔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세요!

잠깐! 컴덕을 위한 TMI (시간 없으면 넘어가세요!)

  • HDMI 2.1의 진짜 능력, VRR과 ALLM: HDMI 2.1은 단순히 높은 해상도와 주사율만 지원하는 게 아니에요. VRR(Variable Refresh Rate) 이라는, 엔비디아 G-Sync나 AMD 프리싱크 같은 ‘화면 동기화 기술’을 표준으로 지원합니다. 덕분에 게임 화면 찢어짐(테어링)이 사라지죠. 또 ALLM(Auto Low Latency Mode) 이라는 기능은, 게임기가 연결되면 TV가 알아서 게임에 최적화된 ‘게임 모드’로 자동 전환시켜주는 편리한 기능입니다. 최신 콘솔 게이머에게 HDMI 2.1이 필수인 이유죠.
  • 케이블 길이의 함정: HDMI 케이블은 디지털 신호지만, 길이가 너무 길어지면 신호가 약해져서 화면이 안 나올 수 있습니다. 보통 5미터까지는 아무 케이블이나 써도 괜찮지만, 10미터, 15미터처럼 아주 긴 케이블이 필요할 때는 신호를 증폭해주는 ‘액티브(Active)’ 케이블이나 ‘광(Optical)’ HDMI 케이블 같은 특수 케이블을 사용해야 합니다.

HDMI 케이블이랑 DP(DisplayPort) 케이블, 뭐가 더 좋아요?

이건 용도에 따라 다릅니다. 일반적으로 TV나 콘솔 게임기 연결은 HDMI가 표준이고, 컴퓨터와 고주사율 게이밍 모니터를 연결할 때는 DP가 더 널리 쓰입니다. DP가 보통 HDMI보다 더 높은 대역폭을 먼저 지원해왔기 때문이죠. 하지만 최신 HDMI 2.1 규격이 나오면서 이제 성능 차이는 거의 없어졌습니다. 그냥 내 기기가 지원하는 단자에 맞춰 쓰시면 됩니다.

HDMI 단자 모양이 다른데요? (Mini, Micro)

네, 휴대용 기기를 위해 단자 크기를 줄인 버전들이 있습니다.
Micro HDMI (Type D): 스마트폰이나 태블릿, 소형 카메라에 주로 쓰입니다.
단자 모양만 다를 뿐 기능은 똑같기 때문에, 맞는 모양의 케이블이나 변환 젠더를 사용하면 됩니다.
HDMI (Type A): 우리가 아는 표준 크기.
Mini HDMI (Type C): 주로 캠코더나 일부 그래픽카드에 쓰입니다.

케이블을 샀는데 HDMI 2.1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해요?

가장 확실한 방법은 포장에 ‘Ultra High Speed HDMI Cable’ 이라는 공식 인증 로고가 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. 이 인증을 받으려면 HDMI 포럼에서 정한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거든요. 그냥 ‘HDMI 2.1 지원’이라고만 쓰여 있는 것보다 이 공식 인증 로고가 있는 제품이 더 신뢰할 수 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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